괴담

[괴담]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ssul

오링어 2021. 9. 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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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맑군요.


하루가 지나기는 했지만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제의 뉴스에는 기공식에 참여해 삽을 푸는 당신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인재 양성을 위해 큰 돈을 쏟아부었다는 센터는 아마 당신의 이름이 현판 위로 새겨지겠지요.


이 역시 축하할 일입니다.


사실 엄연히 따져 말해 당신의 웃는 얼굴을 지켜보기 위해 내가 뉴스를 시청한 건 아닙니다.


그러고보면 메모는 잘 전달됐는지 궁금하군요.


당신이 기공식 준비에 바빠 으레 받아볼 수 있는 협박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메모를 허투루 보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물론 협박편지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빈곤하죠.


그저 과거의 사실을 나열한 것뿐이니 말입니다.


과거....... 이 얼마나 미래의 멱살을 틀어쥐는 단어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요구한 건 단 한 가지였습니다.


과거의 일을 스스로 공식석상에서 인정해달라.


앞뒤 자르고 일방적인 요구를 해댔으니 당신이 우습게 여긴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자제분, 그러니까 아드님이 당신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했을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음, 지금쯤 아드님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을까요.


아무리 자식이래도 스무살이 넘고나면 행동에 자유를 주기 마련이죠.


하루 이틀의 외박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모든 게 다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 아들을 당신이 차로 치었을 때,


정정합니다.


공식적인 발표마냥 당신의 운전기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실수로 지나쳤을 때, 오랜 시간 차가운 땅 위에서 떨었을 내 아들에게도 아마 살아날 수 있었을 때라는 게 존재했을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리도 원통해한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 어머니라니.... 제가 너무 맥락없는 이야기를 했군요.


하지만 아마 모르는 일만은 아닐 겁니다.


한동안 당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노파를 기억하시는지.


노친네가 성격이 괄괄했죠.


무기력증에 빠진 아들대신 몇 번이고 당신을 찾아가던 뒷모습이 새삼 기억에 남습니다.


갓 스물이 넘은 손자를 벼락 맞듯 하루아침에 떠나보내고 가슴에 열화가 생긴 노인입니다.


압니다.


그 연령대의 노인을 꾸준히 상대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말도 통하지 않는데다 줄창 자신의 목소리만 되뇌이기 일쑤이지요.


그런 지긋지긋한 노파를 떼놓기 위해 당신이 냅다 돈봉투를 던진 것 역시 전혀 이해 못할 일만은 아닙니다.


하다보니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와 말이지만,
그날 말입니다. 무더웠던 여름날.


아들내미가 사고가 난 건 추운 겨울이었으니 구별하시겠지만 그 여름날에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스스로의 몸에 기름을 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으셨을까 생각해보면 육개월의 시간과 푸른 지폐로 화한 어머니의 노고가 불씨가 되어 어머니의 몸을 살랐던 게 아닌가
혼자 짐작해볼 따름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당신과 엮인 뒤 우리 가족은 상당히 유명해졌습니다.


저녁 뉴스에 기삿거리로 등장한다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지요.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내 아들의 죽음은 노랗게 바랜 신문조각으로만 남았지만 어제의 죽음은 아마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우리 어머니의 죽음을 녹화된 영상으로 봤다는 걸 당신에게 이야기했습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당신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분신 자살’ ‘실제 화형’ ‘불타는 사람’


금지된 것일수록 사람들의 은밀한 호기심은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는 모양입니다.


4분 20초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머니의 비명을 수천명의 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에 나는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어제 짧게 소개되는 기공식 뉴스를 보며 나는 뚫어져라 당신의 입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입에서 진실이 실토되기를,


당신을 용서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직은 어린 당신의 아들을 놓아주기 위해.


화면을 바라본 채로 진중한 표정을 띤 당신은 이쪽을 보았고,


날씨는 좋았고,


짧은 순간에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화염 속에서 5분 8초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이 편지를 당신이 읽을 때쯤에는 아마 다수의 사람들이 인터넷 속에서 당신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은 따로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이 복수심에 불타 다른 감정들을 내리누르는 것을 결코 원치 않습니다.


이제 나는 내 가족의 곁으로 갑니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오래도록 당신이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무탈하게, 온전한 정신으로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짓이겨진 살갗을 소금물에 절인 것 마냥
오래도록 건강하십시오.


다시 한 번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가정 내 평화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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