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 사고. ssul

오링어 2022. 1. 1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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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3분에 일어났다.



이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책임 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래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가 안전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 발전소가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체르노빌 원자로에도 안전장치는 다 붙어있었다.



근데 왜 폭주했냐고?



당시 체르노빌 원자로는 ECCS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위와 같이 인위적으로 원자로를 중단시키는 실험을 하면 원자로의 연쇄반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원자로 재가동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하지만 높으신 분께선 이것이 매우 귀찮았고 공돌이 엔지니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했다.



(집에 누전차단기 내려가면 귀찮다고 누전차단기 안 달고 전기쓰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결과는 알다시피...

그후 화재가 발생하자, 1차로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었고,

그 다음으로 급히 달려온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 지휘하는 체르노빌 소방대가 전력을 다해 진화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방사능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쳤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재난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진화작업에 전력을 다했고,

결국 오전 5시에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량의 물이 사용되었고,

이 물은 4호로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했으며 이것이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26일 오후 9시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키고 만다.



(*소방대는 역부족임에도 불구하고 화재진압과 3호로의 보호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3호로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만약 이것까지 터졌으면 재앙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이 공적을 인정받아 텔랴트니코프는 그의 부하인 블라디미르 프라비크과 빅토르 키베노크와 더불어 소련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53세가 되던 2004년에 암으로 죽었으며, 키예프에 마련된 그의 무덤에는 그를 위한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이고르 코스틴은 1진으로 도착한 보도사진작가들 중 한 명으로 헬리콥터에 탑승해 사고 현장을 촬영하였다.



그의 카메라들은 몇 분만에 전부 고장나버리는 바람에 겨우 12장만을 찍을 수 있었다.



방사선의 위력에 대해 잘 몰랐던 그는 의아해하며 배터리가 나간 정도로 생각했다.


사고 첫날의 방사능 누출량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26일 밤에 원자로에서 다시금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방사능 물질의 누출량이 크게 늘었고,

이에 따라 소련 당국도 주민들을 피난시키기로 결정했다.



(*처음 어서 대피해야한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씹고나서 30시간뒤의 결정이었고, 이미 원전주위의 주민들은...)


사태가 워낙 심각했던 까닭에 군부대와 경찰, 소방관 등 수십만의 인력이 인근으로 투입되어 인원을 대피시켰다.



처음에는 프리피야트와 체르노빌, 그 인근 지역 주민들만 피난시켰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위험지역은 점차 확대되었기에 4월 30일부터 추가적인 소개 작업이 시작된다.



최종적으로는 발전소 주변 30km 이내의 주민 전부가 철수하였으며, 방사능 물질이 대량으로 뿌려진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이 종료된 것은 8월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남은 군인과 전문가들
소련 헬기비행단 앤토치킨 대령과 그의 조종사들


물이 소용없음을 깨달은 소련 당국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대량의 붕소,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을 뿌렸지만, 방사선이 너무 강해서 원자로 위에 헬리콥터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고,

이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원자로 상공을 지나가면서 흙을 뿌리도록 해야 했다.



이 방법은 5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나, 흙이 4호로만이 아닌 주변까지 뿌려지면서 열이 식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헬리콥터도 추가 폭발 위험 때문에 물러나고 말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4호로와 딱 붙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호로가 무사했던 것이다!



결국 여기에 있던 액체 질소가 4호로에 주입되었고, 5월 9일에 화재 진압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헬기 조종사들은 치명적인 방사능에 피폭당했다.



핵로 위의 방사능 수치는 3,500퀸트겐



이는 치사량의 9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조종사 일부는 하루에 33번 비행하여 접근해야했다.


화재를 진압한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사고 첫날 화재진압을 위해 뿌린 물이었다.



사고 직후 녹아 내리는 노심과 방사능 물질이 원전 지하에 흐르는 지하수와 결합할 시 3에서 5메가톤의 대폭발이 일어나게되는데, 이렇게 되면 수습이고 뭐고 없다.


이를 막기 위해 펌프기사 알렉세이 아나넨코(Alexei Ananenko), 발레리 베스팔로프(Valeri Bezpalov)와 일반사병인 보리스 바라노프(Boris Baranov) 3사람이 램프를 들고 직접 지하로 들어가 방사능에 오염된 물로 잠수, 펌프를 가동시켜 지하수를 차단했다.



잠수 후에 램프가 나가는 낭패를 겪었지만, 기적적으로 그들은 밸브를 열고 살아서 물밖으로 나왔다.



애석하게도, 3명 모두 공식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에 방사선 장애로 사망하였으나 정확한 사망 시점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하수를 빼내었지만...


용융된 핵연료 마그마들이 점점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목숨걸고 찍은 녹아버린 핵연료 마그마)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핵연료가 누출될 경우 대수층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서부 러시아의 전체 식수원이 오염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혹여나 오염될시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마그마를 식히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방사선이 그나마 약한 지하쪽으로 땅굴을 파들어간 다음 발전소 아래에 액체질소를 사용한 냉각기를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소련 전역에서 광부들이 소집되었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열기 안에서 광부들은 한달만에 작업을 완료했는데, 통상의 삼분의 일로 단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반이 매우 좁고 더워서 방호복을 입을 수 없는 상황에서 토양은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광부들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재수가 없어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을 먹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광부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한 끝에 발전소 아래에 공간을 마련하고 나니 정작 냉각기 완성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다.



결국 액체질소 냉각기는 취소되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로 채워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심각한 문제들이 끝나고, 이제 저 방사능에 찌든 것들을 처리할 차례


원전사고 18일



그야말로 공산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무한한 인력동원과 인권이나 자유를 무시한 조치들이 이런 비상 상황에는 효력을 발휘했다.



소비에트 휘하의 모든 공화국에서 인구비례로 인원을 할당하여 소련 전체에서 총 60만명(!)의 인력(주로 예비군)을 징발해냈던 것이다.



소비에트의 높으신 분들은 엄청난 인원을 조금씩 피폭시키는 방식으로 체르노빌 근로인력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한 것이다.



총지휘는 니콜라이 타라카노프(Nikolai Tarakanov) 장군이 맡았다


작업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의 인권이나 자유는 무시되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모든 집과 건물은 불도저로 밀어버린 후 땅에 묻었고, 남아있던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당했다.



모든 도로는 다시 포장되었고, 오염된 흙은 파내어졌으며, 오염된 시설에는 특수 액체나 증기, 모래 등으로 청소가 실시되었다.



가축들은 모두 이주되거나 사살되었고, 야생동물 역시 별도로 편성된 사냥팀에 의해 사살된 후 구덩이에 묻혔고, 그 위에는 콘크리트가 부어졌다.



물론 근처에 있던 댐과 호수의 오염 제거 작업도 병행되었으며, 이 덕분에 체르노빌 원전으로 진입하는 길이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 폐기물이 발생하였고, 이것들은 프리피야트 인근에 묻혔다.



이 구덩이가 800군데쯤 되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하다. .


소련군이 폭심지 주변을 헬기로 찍은 화면에서는 아직도 방사성 물질이 나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대해 엔지니어들은 거대한 석관을 씌워 뚜껑을 덮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방사능을 막기 위해 운전석을 납으로 덧되었다.



체르노빌 원전을 완전히 뒤덮을 석관의 부품은 소련 각지에서 제작되어 운반되었고, 이 부품은 현장에 투입된 인원들이 조립했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발전소 주변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었고, 이런 곳에서 오래 작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발전소 지붕을 정리해야했는데,

지붕은 폭발 당시 튀어나온 감속재 흑연으로 뒤덮여 있었다!

흑연은 원자로 안에 있던 물건이다보니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나름대로 최신 기술인 로봇들을 투입하여 불도저처럼 조각을 지붕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방사선이 너무 강해 며칠 후 로봇이 하나둘씩 모두 고장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작업을 마냥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3,500명 정도의 인력 투입이 결정되었고, 로봇을 대신해 투입된 이들은 바이오로봇으로 불렸다.



문제는 화생방보호의가 없었다는 것.



즉시 우의에 납 판때기를 기워 만든 조잡한 화생방보호의가 만들어졌으나 이마저도 몇 벌 없었던 까닭에 작업인원들이 돌아가면서 입어야 했다.



(*보호복 무게만 30kg)




지붕의 방사선 수치가 너무 엄청나다보니 올라가 잠깐 작업한 뒤 되돌아와 쉬어야 했는데,

작업시간은 보통 2분을 넘기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으며 방사능이 강할 경우 작업시간은 불과 40초로 제한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8명이 뛰어 들어가 삽으로 몇 삽 퍼내고 다시 뛰어나와 재빨리 옷을 벗으면 그걸 다음 조가 갈아입고 또다시 뛰어들어가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삽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때때로 큰 흑연 덩어리는 한두 사람이 손으로 들어 옮기기도 했는데,

시간당 15시버트의 오염물을 단 한번 그렇게 옮긴 것만으로도 복귀 후에는 통증을 느끼며 한동안 주먹을 쥘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위대한 자기 희생의 모습을 찍으려고 같이 현장으로 들어간 사진기사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방사선 모양으로 카메라 필름이 타버린 것을 발견했다.


지붕에서 복귀한 후 코피를 쏟으면 병원으로 실려갔고 몸을 가누지 못하면 집으로(?) 보내졌다는 증언 등을 볼 때, 많은 이들이 급성피폭의 증상을 보였을 정도로 전반적인 피폭량은 매우 높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위에 기재되었듯 40초 이내에 모든 작업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500명이 10일간을 작업한 뒤에야 방사능의 1/3이 줄어들었고, 석관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사고후 6개월...



석관은 1986년 10월에 완성되었으며, 50만 명의 소련군은 방사능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사고 후에도 체르노빌 발전소는 에너지 부족 문제로 운행을 계속했다.



1986년 10월 1호기, 11월 2호기가 운전을 재개해 각각 1996년, 1991년에 가동을 중단했다.



폭발한 4호기와 가까운 3호기는 1987년 다시 가동해 2000년 12월에 폐쇄됐다.



2013년 4호기 잔해를 봉쇄한 콘크리트 석관 일부가 파손돼 붕괴 위험이 제기됐다.



1997년 설립된 체르노빌 방호벽 기금을 통해 2010년 신규 안전 장벽 설치 공사가 시작돼 2016년 완료됐다.



1991년 유엔은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신탁 기금을 조성했다.



체르노빌 발전소 주변의 출입 제한 구역은 유럽에서 야생 동·식물이 가장 번성하는 지역으로 변화했다.



2016년 기준 약 180여 명의 주민이 돌아와 거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1년부터 체르노빌 발전소 주변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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